국내 기업이 해외 고객사에 지식기반 용역을 제공할 때, 계약서의 보험 조항은 대개 두세 줄입니다. 그런데 그 두세 줄이 국내 보험시장에서 조달 가능한 범위를 넘어서는 경우가 드물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은 대개 계약서에 서명한 뒤에야 드러납니다.

검토 사례 (익명)

계약자
국내 기후·환경 분야 컨설팅 기업
상대방
영국 소재 고객사
업무
온실가스·ESG 관련 자문 및 검증 지원 용역
요구
전문직업배상책임보험 · 보상한도 파운드화 표시 · 용역 완료 후 일정 기간 보험 유지
쟁점
한도 통화 / 준거법·재판관할 / 계약 종료 후 유지 의무의 문언 해석 / 소급담보일

왜 CGL이 아니라 PI인가

영업배상책임보험(CGL)은 신체상해와 재물손해를 담보합니다. 그런데 컨설팅·설계·검증·인증지원 같은 지식기반 용역에서 발생하는 손해는 대부분 사람이 다치거나 물건이 부서지지 않은 채 발생하는 순수 재산손해입니다.

산정 수치가 틀려 고객사가 공시를 정정하게 되었다거나, 자문 오류로 인허가가 지연되어 프로젝트 비용이 늘어난 경우가 전형입니다. 이런 청구는 CGL 증권의 전문직업배상 면책 조항으로 명시적으로 빠집니다. 해외 고객사가 PI·E&O를 별도로 요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계약 문언을 먼저 읽습니다 — 견적보다 앞선 순서

보험 조항을 받으면 곧바로 보험회사에 견적을 의뢰하고 싶어지지만, 순서가 반대입니다. 문언 해석이 먼저이고 견적이 나중입니다. 같은 "£1m PI"라도 문언에 따라 조달 가능성이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확인 항목왜 중요한가
한도 기준each claim인지 in the aggregate인지. 1청구당 기준이면 실질 담보력이 크게 달라지고 요율에도 직접 반영됩니다
한도 통화외화 표시 한도를 원화 증권으로 충족하면, 환율 변동만으로 계약상 요구한도에 미달할 수 있습니다
준거법·재판관할Territory(담보지역)와 Jurisdiction(재판관할)은 별개 항목입니다. 해외 법원 관할을 수용하면 인수 가능 보험회사의 폭이 좁아집니다
유지 의무maintain 계열인지 run-off 명시인지. 이 한 단어가 조달 가능 여부를 가릅니다
보험사 요건최저 신용등급, 해지·변경 사전통지 기간, 영문 증명서 제출 의무
추가피보험자PI에서는 요구 자체가 역효과일 수 있습니다 (아래 별도 항목)

핵심 — '계약 종료 후 6년' 조항을 어떻게 읽는가

영국·영연방 계약에서 특히 자주 나오는 조항입니다. 6년이라는 숫자는 대체로 그 나라 계약채무의 소멸시효 기간에서 온 것으로, 용역이 끝난 뒤에도 청구가 들어올 수 있는 기간만큼 보험을 유지하라는 취지입니다.

문제는 같은 취지가 전혀 다른 두 가지 문언으로 표현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국내 조달 가능성은 여기서 갈립니다.

문언 유형실제 의미국내 조달
(가) 유지형
shall maintain / keep in force ... for 6 years
매년 보험을 갱신하여 계속 부보 상태를 유지 가능 — 소급담보일을 승계하며 갱신하면 충족
(나) 사후담보형
shall procure run-off cover for 6 years
계약 종료 시점에 이후 5~6년치를 일괄 담보 사실상 곤란 — 국내 기본 보고연장기간은 6개월

계약서에 적힌 숫자가 6년이라는 사실보다, 그 앞에 붙은 동사가 maintain인지 procure run-off인지가 훨씬 중요합니다.

왜 60개월 run-off는 인수되지 않는가

국내 전문직업배상책임보험의 보고연장기간(ERP)은 6개월이 기본입니다. 연장은 유상 특약으로 가능하지만 보험회사의 인수심사 대상이며, 회사별로 상한이 다릅니다. 60개월을 조건으로 제시하면 인수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구조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run-off 기간에는 신규 보험료 수입 없이 꼬리위험만 남습니다. 보험회사 입장에서는 향후 5년간 제기될 청구를 한 번의 보험료로 일괄 인수하는 셈이고, 그 사이 계약자는 이미 해당 업무를 종료해 위험관리 주체도 사라진 상태입니다. 국내 PI 시장의 규모와 인수 여력을 감안하면 감당하기 어려운 구조입니다.

가장 위험한 시나리오

계약 종료 시점에 사려고 하면, 그때는 이미 선택지가 없습니다

run-off는 계약이 끝나는 시점에 구매하는 담보입니다. 그 시점에 보험회사가 인수를 거절하면 계약자에게 남는 대안이 없습니다. 이미 서명한 계약서에는 6년 유지 의무가 적혀 있고, 이행할 방법은 없는 상태가 됩니다.

따라서 이 조항은 계약 협상 단계에서 처리해야 하는 사안이지, 용역 종료 시점에 해결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닙니다.

대응 사다리 — 위에서부터 순서대로 시도합니다

1순위

문언 확인 — 대부분 여기서 끝납니다

실무상 상당수의 계약이 (가) 유지형 문언입니다. 이 경우 매년 갱신하며 소급담보일을 승계하는 방식으로 충족되며, 추가 협상이 필요 없습니다. 원문을 확인하지 않은 채 "6년"이라는 숫자만 보고 불가능하다고 판단하는 것이 오히려 흔한 실수입니다.

2순위

문언 조정 — run-off를 유지형으로

(나) 사후담보형이라면 발주처와 문언 조정을 협의합니다. "계약 종료 시점에 일괄 구매"를 "용역 종료 후 6년간 매년 갱신하여 유지"로 바꾸는 것으로, 발주처가 얻는 보호 수준은 실질적으로 동일합니다. 오히려 매년 갱신되는 증권이 사후 일괄 담보보다 보험회사 신용위험 분산 측면에서 유리하다는 설명이 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3순위

가용성 단서 삽입 — 이행 불능 리스크 차단

유지형으로 정리되더라도 매년의 갱신 인수 여부는 보험회사 판단입니다. 손해가 발생했거나 업종 인수정책이 바뀌면 갱신이 거절될 수 있습니다. 무조건적 확약으로 수락하면 보험 미조달이 곧 계약 위반이 됩니다.

협의 시 참고할 수 있는 취지의 단서 — "합리적인 상업적 조건으로 해당 보험을 시장에서 인수 가능한 범위 내에서" …to the extent such insurance remains available on commercially reasonable terms. 실제 문구는 계약 전체 구조에 맞춰 법률 검토를 거쳐 확정하십시오.
4순위

조달 경로 확대 — 비용 현실성을 함께 본다

문언 조정이 끝내 어려운 경우 해외 시장 조달을 검토하게 됩니다. 다만 최저보험료 구조상 용역 규모 대비 비용이 맞지 않는 경우가 많아, 계약 수익성과 함께 판단해야 하는 사안입니다. 이 단계까지 왔다면 계약 자체의 수용 여부를 재검토하는 것이 합리적일 수 있습니다.

소급담보일 — 6년을 유지해도 공백이 생기는 경우

유지형으로 정리해 매년 갱신하더라도, 소급담보일이 승계되지 않으면 형식적으로만 부보 상태이고 실질은 무담보가 됩니다.

배상청구기준 증권은 소급담보일 이후에 수행한 업무에 대해, 보험기간 중에 제기된 청구를 담보합니다. 갱신하면서 소급담보일이 갱신일로 밀리면, 정작 6년 유지 의무의 대상인 과거 용역 수행분이 통째로 담보에서 빠집니다.

보험회사를 변경할 때 특히 위험합니다. 신규 계약이라는 이유로 소급담보일이 개시일로 설정되는 경우가 있고, 계약자가 이를 인지하지 못한 채 갱신이 진행되기도 합니다. 매 갱신 시 소급담보일 승계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 6년 유지 조항의 실질적 이행입니다.

PI에 추가피보험자를 넣는 것이 오히려 문제가 되는 이유

발주처가 CGL에 요구하는 조건을 그대로 PI에도 적용해 추가피보험자 지정을 요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PI에서는 이 요구가 발주처 본인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습니다.

배상책임보험에는 통상 피보험자 상호간 청구를 담보하지 않는 조항이 들어 있습니다. 발주처가 추가피보험자로 들어가 있으면, 발주처가 계약자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할 때 같은 증권의 피보험자끼리의 청구가 되어 담보에서 빠질 소지가 생깁니다. PI를 요구한 목적 자체가 무력화되는 것입니다.

이 지점은 발주처 담당자도 모르는 경우가 많아, 요구를 그대로 수용하기보다 구조를 설명하고 지정 대상에서 제외하는 협의가 필요합니다. 대위권 포기나 해지 사전통지 같은 다른 부대조건은 PI에서도 통상적으로 처리 가능합니다.

전문업무 정의 — 담보 범위를 결정하는 문장

PI는 증권에 기재된 전문업무 범위 내에서만 담보합니다. 자문에 그치는지, 검증·인증 절차에 관여하는지, 물리적 산출물의 제조·공급까지 나아가는지에 따라 인수 심사 강도와 담보 범위가 달라집니다.

특히 자문업무와 제조·공급이 섞여 있는 경우, 제조·공급 부분은 PI의 대상이 아니므로 별도 검토가 필요합니다. 실제 수행 업무를 매출 비중과 함께 빠짐없이 기재하고, 전문업무 정의 문구를 인수심사 전에 확정하는 것이 사후 분쟁을 줄이는 방법입니다.

본 글은 익명 검토사례를 바탕으로 계약 조항 해석과 보험 설계 구조를 일반화해 정리한 것입니다. 담보 범위·면책 조항·특약 명칭과 보고연장기간 운영 방식은 보험회사와 약관에 따라 다르며, 보험료·보상한도·자기부담금·특약 적용 여부 등 모든 인수조건은 보험회사의 인수심사 후 확정됩니다. 특정한 인수 결과나 갱신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계약서 문언의 법적 효력에 관한 판단은 법률자문의 영역이며 본 글은 이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계약 서명 전 체크리스트

  • 보험 조항 원문 전체를 확보했는가 (요약본이 아니라 조문)
  • 요구 한도가 1청구당인지 연간 총액인지
  • 한도 통화와 증권 통화가 일치하는가 (환율 변동 시 미달 소지)
  • 준거법·재판관할이 어디인가 — 담보지역과 재판관할은 별개 항목
  • 유지 의무 문언이 maintain 계열인지 run-off 명시인지
  • 무조건적 확약인가, 가용성 단서가 있는가
  • 소급담보일을 실제 업무 착수일 이전으로 설정할 수 있는가
  • 갱신·보험회사 변경 시 소급담보일 승계 절차가 정해져 있는가
  • 추가피보험자 요구가 있는가 — PI에서는 역효과 검토 필요
  • 보험회사 최저 신용등급·해지 사전통지·영문 증명서 요구 여부
  • 증권의 전문업무 정의가 실제 수행 업무를 포괄하는가

정리

해외 용역계약의 PI 조항에서 한도는 대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계약이 실제로 막히는 곳은 계약 종료 후 유지 의무이고, 그 처리 가능성은 계약서에 서명하기 전에 결정됩니다.

서명 후에 조달 불가를 발견하면 협상 카드가 사라집니다. 보험 조항은 계약 검토 항목 중 가장 뒤로 밀리기 쉽지만, 국내 보험시장에서 조달 가능한 범위를 넘어서는 문언은 수주 단계에서 조정하는 것 외에 방법이 없습니다.